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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낼 12시 산곡역에서 뵙겠습니다. 갈비탕 어때요?
-그건 내 입맛에 맞추려하지 말고 어머니 식성에 맞춰 난 아무것도 좋아..
그리고,이번에 그 식사자리에 질부도 같이 동행했으면 해...
-그 사람은 학원 출근으로 힘들거 같네요 암튼 낼 뵙겠습니다.
ㄱ 구청 비서실장직에서 자진 사퇴한 조카 <정환>
너무 힘들어 선거끝난뒤에 사표내겠다고했었다.
하남에서 살다가 정환아들 곁으로 이사온 고종사촌 형수.
7호선 대림역서 전철로 1시간 거리.
경노석에서 편히 눈감고 가다보면 한 시간은 금방이다.
고모의 며느리며 나완 고종사촌형수다.
군 제대하곤 내일의 희망없는 농촌에서 놀다가 동해형님의 주선으로 임시직인 <산포면사무소>출근
했었다.
집에서 산포면까지 먼 거리라 아버지의 부탁으로 나주 시내의 <동문 목공소>의 고모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자전거로 출근하곤 했다.
나주 시내의 번화가 <동문목공소>는 매일 차들의 소음으로 엄청 소음이 컸지만 어쩌겠는가?
그곳에서 자전거 출근이면 10여분이면 직장에 도착하는데 이런고통은 참아야했다.
당시
그 집은 상가라 집의 규모가 컸지만 그래도 고모부식구와 형님식구등 7명의 대가구 지만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잘 챙겨준 그 정을 잊을수 없었다.
가장 어려울거라 상상했던 형수님이 의외로 잘해주시고 도움을 주셨다.
그런게 다 아버지와 고모부와의 소통이 되는 것이라 그랬을거다.
고모님은 막내동생인 아버지를 퍽 좋아하셨기에 틈틈이 가족몰래 당신의 용돈을 쥐어주시곤 눈을 껌벅
거리셨다.
아무리 좋은 며느리라 해도 용돈을 주는 시어머니가 좋겠는가?
1972년 3월 부터 9월까지 6 개월을 함께 기거했던 그 동문목공소.
당시는,
모든 가구는 손으로 하는 수작업이라 그런 기술을 익힌 형님은 나주시내선 알아주는 장인으로 돈도
엄청 벌었었다.
그래서 그 세든상가도 매수하지 않았던가?
-힘든 농삿일을 하질 않아도 돈을 잘 벌수 있다는 직업인 목공.
아버진 께나 부러우셨던가 보다.
그런 기술좋은 자식을 둔 고모부가 늘 나주가면 들린 그곳에서 부러움을 샀던거 같다.
집요하게 형님을 목공기술자 되라고 했으나, 취향이 아닌걸 억지로 할순없는 일.
그때,
눈망울 초롱초롱했던 정환이..
50대 중반의 신사로 바뀌어 서 있다.
-갈곳이 있어 나온건가?
-제 분야가 환경 분야거든요 다시 국회로 들어가 본업무를 하고 싶어요.
사표내니까 구청장이 자꾸 붙잡더라구요 어쩔수 없이 제 본업을 하고 싶다 했어요
글고 너무 힘들어요 ,,
이미 노쇠한 형수는 거동은 자유롭지 못해도 건강한 모습은 여전해 보인다.
매일 정해진 요양보호사가 와서 도움을 주고 있어 편하다지만....
그 생활이 오죽하겠는가?
8년전인가?
일산의 암병동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고 나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던 형님의 작은 체구와 서글푼 미소
그게 마지막 모습였었다.
자신의 운명을 안듯이 어쩜 그렇게 짠해 보였을까?
이런 형수님도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언젠가 또 이별을 하겠지.
자꾸 손사레 치면서 싫다는 형수의 앞에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제 마음입니다
글고 더욱 건강하게 만나서 그 시절의 애기를 또 합시다
이곳을 아니까 또 오겠습니다..
-네네 아제도 건강하세요 그래도 건강해 보여 좋아요
-네 네..
세월은 까마득하게 흘렀지만,그때의 고마움을 어찌 잊겠는가?
-그건 내 입맛에 맞추려하지 말고 어머니 식성에 맞춰 난 아무것도 좋아..
그리고,이번에 그 식사자리에 질부도 같이 동행했으면 해...
-그 사람은 학원 출근으로 힘들거 같네요 암튼 낼 뵙겠습니다.
ㄱ 구청 비서실장직에서 자진 사퇴한 조카 <정환>
너무 힘들어 선거끝난뒤에 사표내겠다고했었다.
하남에서 살다가 정환아들 곁으로 이사온 고종사촌 형수.
7호선 대림역서 전철로 1시간 거리.
경노석에서 편히 눈감고 가다보면 한 시간은 금방이다.
고모의 며느리며 나완 고종사촌형수다.
군 제대하곤 내일의 희망없는 농촌에서 놀다가 동해형님의 주선으로 임시직인 <산포면사무소>출근
했었다.
집에서 산포면까지 먼 거리라 아버지의 부탁으로 나주 시내의 <동문 목공소>의 고모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자전거로 출근하곤 했다.
나주 시내의 번화가 <동문목공소>는 매일 차들의 소음으로 엄청 소음이 컸지만 어쩌겠는가?
그곳에서 자전거 출근이면 10여분이면 직장에 도착하는데 이런고통은 참아야했다.
당시
그 집은 상가라 집의 규모가 컸지만 그래도 고모부식구와 형님식구등 7명의 대가구 지만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잘 챙겨준 그 정을 잊을수 없었다.
가장 어려울거라 상상했던 형수님이 의외로 잘해주시고 도움을 주셨다.
그런게 다 아버지와 고모부와의 소통이 되는 것이라 그랬을거다.
고모님은 막내동생인 아버지를 퍽 좋아하셨기에 틈틈이 가족몰래 당신의 용돈을 쥐어주시곤 눈을 껌벅
거리셨다.
아무리 좋은 며느리라 해도 용돈을 주는 시어머니가 좋겠는가?
1972년 3월 부터 9월까지 6 개월을 함께 기거했던 그 동문목공소.
당시는,
모든 가구는 손으로 하는 수작업이라 그런 기술을 익힌 형님은 나주시내선 알아주는 장인으로 돈도
엄청 벌었었다.
그래서 그 세든상가도 매수하지 않았던가?
-힘든 농삿일을 하질 않아도 돈을 잘 벌수 있다는 직업인 목공.
아버진 께나 부러우셨던가 보다.
그런 기술좋은 자식을 둔 고모부가 늘 나주가면 들린 그곳에서 부러움을 샀던거 같다.
집요하게 형님을 목공기술자 되라고 했으나, 취향이 아닌걸 억지로 할순없는 일.
그때,
눈망울 초롱초롱했던 정환이..
50대 중반의 신사로 바뀌어 서 있다.
-갈곳이 있어 나온건가?
-제 분야가 환경 분야거든요 다시 국회로 들어가 본업무를 하고 싶어요.
사표내니까 구청장이 자꾸 붙잡더라구요 어쩔수 없이 제 본업을 하고 싶다 했어요
글고 너무 힘들어요 ,,
이미 노쇠한 형수는 거동은 자유롭지 못해도 건강한 모습은 여전해 보인다.
매일 정해진 요양보호사가 와서 도움을 주고 있어 편하다지만....
그 생활이 오죽하겠는가?
8년전인가?
일산의 암병동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고 나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던 형님의 작은 체구와 서글푼 미소
그게 마지막 모습였었다.
자신의 운명을 안듯이 어쩜 그렇게 짠해 보였을까?
이런 형수님도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언젠가 또 이별을 하겠지.
자꾸 손사레 치면서 싫다는 형수의 앞에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제 마음입니다
글고 더욱 건강하게 만나서 그 시절의 애기를 또 합시다
이곳을 아니까 또 오겠습니다..
-네네 아제도 건강하세요 그래도 건강해 보여 좋아요
-네 네..
세월은 까마득하게 흘렀지만,그때의 고마움을 어찌 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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